풍기주변 볼거리

소백산자락길

산골래기 2011. 6. 2. 00:05

비가 오락가락하며 내린다

소백산자락길을 가기로 했는데...  일기예보에 비님이 충청도 이남으로 내려간다고  방송은 전한다

갈까 말까 망설이다 비가 온다고 못 걷는것은 아니니...    가자

아침 일찍 차를 몰고 중부고속도로를 걸쳐 영동. 중앙으로 풍기로 향했다

오늘 목적지는 풍기 삼가동에서 순흥 소수서원까지다

 

 이 죽령터널을 빠져나가면 나의고향인 풍기다

여기는 구간단속하는곳이라 터널내에서 100Km이상 달리면 안된다. 터널을 빠져나와서 약 500m를 가면 끝이다

초행길로 가는 운전자는 명심 하기 바랍니다.

다행이 비는 오지 않았다

 

풍기에서 유명한 한우고기집 횡재먹거리라는 집도 유명하지만

역전에 역전한우숯불식당 정육점과 같이 하는 조그만 식당인데 음식이 깔끔하고 특히 청국장이 심심한게 참 맛있다

물론 한우도 입에서 살살 녹는게...

 한우갈비살과 청국장으로 든든히 식사를하고 길을 나섰다

 

풍기시내에서 출발을 하여 삼가동 가기전 자락길에 포함 되어 있지는 않지만 풍기에 갔으면 꼭 들러 보았으면 하는 곳이다

 

 경북항공고등학교(옛 풍기고)뒤에 풍기향교가 있다

문이 잠겨 있어 들어 가질 못하고 담 넘어서 한장!

옛날에는 금계동에 있었는데 옮겨 왔단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 여학생들 예절연습 사진찍고 하던곳

풍기향교는 ..... 역사는 .. 인터넷에서

 

경북항공고등학교

풍기의 수많은 인재를 양성한 곳

고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궁정동 만찬장에 있었던 육군참모총장 출신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씨의 부친이 설립한 곳 

이 마을이 교촌동이다. 교촌치킨의 본산이 아니고 교촌(향교와 서당이 있던곳)

 

 

 

금선대 바위위에 올라 앉은 신선들이 노닌다는 뜻의 금선정

목민관으로 교육과 민생에 평생을 바친 돌아 가실때에는 장례조차 치룰 수 없었던 청백리 금계 황준량의 후손이 건립한 곳

 

풍기군수를 지낸 퇴계 이황이 금선대에서 지은 시 한수

"신선 될 재주  없고 삼신산을 못찾고

구름바라보며 시냇물로 입을 헹구네

금계에 때때로 와서 세상근심 씻는다네"

 

금선정에서 조금 위로 올라가면 산중턱에 금양정사라는 곳이 있다

황준량선생이 학문를 수학하던곳(퍼온 사진)

 

 

멀리 소백산 비로봉이 보이는 삼가저수지

 

 

 

삼가분교 옛 북부국민학교 삼가분교 지금은 없어지고 북부국민학교도 이젠 풍기초등학교로 흡수 되었다 

풍기인근에는 규모가 작은 학교가 여러곳 있었다

중,고등은 모두 타지로 가지 않으면 풍기로 온다 

풍기초등을 비롯하여 북부,창락,봉현,봉현남부,봉현서부 초등학교가 있었다

이곳 동기들이 같이모여 서울서 모임을 하고 있다  "소백풍경"

삼가분교 자리위에 용천동이라고 용이 승천한 연못이라는 곳이 있은데

여기가 정감록에 나오는 난중에 몸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곳

십승지중에 가장 먼저 나오는 풍기 . 그 피난처가 용천동이다

 

<퍼온사진> 

이름하여 금계바위 황금닭을 닮은 형상의 바위로 소백산 비로봉을 가다보면 좌측 옛삼가분교 위 용천동 위에 보면 있다

 

일제시대때 금과중석을 캐던곳으로

"닭 눈동자  해당하는 부분에 빛나는 보석이 있었는데 어느날 금을 캐던 광산 공사감독이 사욕을 탐하여 보석을 채취 할려고

바위 위를 올라 보석을 취 할려는 순간 천둥소리와 함께 벼락이 내리쳐 그만 즉사하고 말았다"

욕심이 과하면 하늘에서 벌을 내린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야기를 들은 어린마음 초딩 이였던 나는 그 보석을 찾으려 간 적이 있었다

결국엔 돌부리에 채여 발가락에 피만보고 돌아왔다

지금도 무너진 잔돌더미위로 가다보면 수정이 박혀 있는 돌을 종종 볼 수가 있다

 

 

삼가동에서 직진을 하면 비로사를 거쳐 소백산 비로봉을 오르는 길이요

우측 산골민박쪽으로 가면 순흥 초암사 죽계계곡으로 가는 자락길이다

 

 이 종을 치지않고 가면 다리가 삔다고 한다

 

억새밭은 아직도 작년가을과 봄이 혼돈이다 

 

 비가 그치려는지 모양인지

 

 폭신폭신한 잣나무 숲길을 오르면  오르막 끝이다

 

 지금부터는 내리막길 풍기에서 택시를 타면 산골민박 아래 까지 올라온다

비로봉에 다녀오다 힘이 빠지면 이곳에서 풍기택시를 콜하여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려간다 

 국립공원 매표소를 차량으로 통과 할려고 하니 주차료 오천원을 달라고 하여

사람만 내려주고 주차는 하지 않는다고 하였더니 안된단다

그래서 거기서부터 자락길을 걸었다

 

 작은골짜기 목교도 건너고

 

점점 더 많은 물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소발자욱이 찍힌바위 발자국크기로 봐서는 황소가 엄청컸던 모양이다

 

 

 

소백산 철쭉제가 다음주 부터인데 오면서 자락길에 첨 본 철쭉 

비로봉에서 연화봉가는 꼭대기에 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한강나루길,소백산자락길,등  걷다보니 많이도 탔네. 내가 봐도

 

 

 

초암사

호국사찰인 부석사를 창건 하기 위하여  신라 때 의상대사가 임시로 초막을 지어 거처한곳

부석사를 창건 한 후  절을 세워 명명하니 곧 초암사다  

 

 

 

죽계1곡 폭포 우측에 1곡이라고 한문으로 써 있다

 

죽계2곡

 

죽계계곡

 

소백산 국망봉에서 발원하여 초암사앞  금당반석을 제1곡으로 하여 9곡까지 약 2km를 흐르는 게곡으로

고려후기 대문장가인 근재 안축선생의 "죽계별곡"의 배경지이기도 하다

퇴계 이황이 1곡에서 9곡까지를 명명 하였으나 지금은 1,2,4,5,9곡만 전해져 온다

 

 

옆지기와 나의 친한 친구 처

 

 

 

 

 

가을이 오면 단풍이 참 멋있을것 같아 친구와 가을에 다시 걷기로 했다

 

국망봉이 바라 보이는 배점저수지

 

배점저수지를 끼고 내려가니 모심기가 한창이다 길가 도라지밭도.. 꽃이 피면 작품이 될것 같다

 

 

 

 

6억원짜리 소나무

 

순흥이 충절의 고장으로 알려지게  되는 사건 발원지이다

사실인즉  때는 지금으로 부터 약555년전 세종이 돌아 가시자 12세의 어린 단종이 즉위하게 된다

 숙부인 수양대군이 3년간 섭정을 하다가 조카인 단종을 페위하고 왕위에 오르니 이다

세종의 6번째 아들이자 세조 동생인 금성대군이 사육신 성상문,등과  단종폐위사건에 연류되어

금성대군은  순흥도호부로 유배를 오게 된다

어린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소백산 너머 영월 청령포에 유배오니 소식을 전해들은 지역선비들은

국망봉에 올라 절을 하는 선비도 있었고 계립령을 넘어 영월 청령포로 강가에서 예를 다하고 오는 선비 있었으며

단종에 대한 충절이 서서히 복위움직임으로 변하여 가고 있는 중이었다

금성은 단종측과 긴밀한 접촉을 주고 받았으며 

귀양살이를 하던 금성은 왕족출신이라 상당한 재력도 있었으며 심복과 약간의 무사들도 고용을 하고 있었다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그리고 무명지사들이 규합하여 순흥도호부 소속 군사로 복위사건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단종복위사건의 요지는 청령포에 유배온 단종을 모시고와 영남지방을 호령하여 군사를 규합한 후 여세를 몰아 세조정권을

 타파하여 단종을 복위 하자는 계획 이었다

어느날 밤 금성과 이부사가 밀담을 나누는데...

"   반란의 내용을 조정에 보고하면 수많은 재물을 얻을수 있다' 말로 금성대군의 시녀를 꾀어 정보를 취하고 있던

순흥부 급창(명을 받들어 큰소리로 전하는 관노) 이동은 벽장속에서 밀담을 엿들엇다                            "

삼국시대때 소백산맥을 경계로 신라와 고구려간 접경지인 관계로 산성이 있었고

중앙에서 군사가 쳐 내려올 경우 조령과 죽령에서 방어를 하기가 용이하여 충분한 시간을 벌수가 있었다

 

드디어 격문 돌리고자 하였으나 이미 관노 이동이  격문을 훔쳐 한양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사실을 기천(현 풍기)현감에 전하고 이동을 뒤 쫒으라 하여 역마를 타고 가서 이동을 잡았다

격문을 읽어본 현감은 내용이 단종복위였다 

순흥으로 가야하나 한양으로 가야 하나 .....역사적 사실이 뒤바뀌는 순간이다 

현감은 그대로 말을 몰아 역모를 고변하니

 세조는 즉시 정3품인 안동도호부 수장으로 하여금 예천,영천 군사들과 규합하여 순흥도호부를 초토화  하니 정축지변이다

순흥30리 안쪽은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개나 닭의 울음소리 조차도 들을수 없다고 순흥 향토지는 전한다

순흥은 남순북송이라" 남족에는 순흥이 있고 북쪽에는 송악이 있다"고 할 정도로 번창한 곳이었다

이리하여 순흥도호부는 풍기,봉화 ,영천소속으로 약200년동안 나뉘어 지고 역사속에 당분간 순흥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를 빌미로 세조는 피비린내 나는  반대파를 숙청 하는데...

 

 

 

여기에 연루된 금성대군은 탱자나무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우물안에 기거하는 형벌중에 가장 혹독한

위리안치에 처해져 결국엔 교수형을 당하고

순흥부사인 이보흠은 귀양가서 교살되고

단종도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등되고

청령포로 사약을 가져온 금부도사가 차마 단종에게 여기에 온 이유를 설명을 하지 못하자 

관노가 스스로 자청하여 등뒤에서 오랏줄을 던져 목을 메어 죽이니 이때 단종 나이17세

단종누님 경혜공주는 진주관노로 가게되고 남편 정종은 죽임을 당하고

단종의 장인 송현수와 부인 문씨는 목졸아 살해되고

하늘도 울고 소나무도 울고 조선이 모두 울었다

글을 쓰는 나도 목이 메이었다

정축지변에 가담한 수많은 선비들이 죽계천 개울가에서 철퇴에 맞아 죽으니

 그 피가 얼마나 많은지 수십리에 이르어 그치니 그곳이 현 영주시 안정면 동촌리 일명 피끝(끈)마을이다

 

수백년이 지난 후 이들이 복위되어 상단에 금성대군을 모시고 좌단에 순흥부사 이보흠을 우단에 순절의사들을 모시고

단을 쌓아 제를 올리니 바로 금성단이다

 

 

이 옆에 은행나무잎이 오리발처럼 생긴 그리 크지 않은 은행나무가 있는데...

어떤 무명도사 왈 "순흥이 망하면 저 은행나무도 죽을것이고 은행나무가 살면 순흥이 흥 할것이다"라고 말을 했는데

숙종이 즉위하여 단종을 복위하니 이듬해 죽었던 은행나무에서  200년만에 잎새에서 움이 트니

이 은행나무가 바로 1100년된 압각수이다 

 

 

 

여기서  조금만 내려가면 '제월교"라는 현대식 교량이 나오는데 일명 청다리라 불리는 곳이다

"청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라는 말의 근원지

흔히 "다리밑에서 주워 왔다"고 많이들 그런다

소수서원과 선비촌 사이로 흐르는 죽계천을 가로 지르는 다리로 세가지 설이 있다

 

하나.단종복위운동 실패로 많은 유생과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자 남은 자식들을 데려와 키운데에서 생긴 말

 

둘.소수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혈기가 넘쳐 근처 처자들과 정을 통하여 아이를 낳아 청다리 밑에 버리는 일이 많았다 

이 소문이 전국으로 퍼져 자식 없는 집에서 아이을 구하려고 청다리와서 아이를 주워 가곤 했다는 이야기는 일제때 일본이 지은 이야기로

재수가 좋으면 도착한날에 아이를 득 할수 있었고 며칠씩 묵으면서 아이를  기다리기도 한 곳이다

당시 유생들은 양반집 자제로 요즘 말하면 엘리트 출신들이다

그러니 주워온 아이라도  양반이라 할 수도 있었다. 무자식 양반집에서 많이 이용

유생들이 많을 때는 수백명이라 하였으니 인구비례에 반하여 요즘 대학가 정도

 

셋. 청다리 건너 아들을 하나둔 과부가 살았는데 장날 개울건너편에 사는 짚신장수를 만나 정을 나누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안 아들은 어머니를 위하여 개울에 징검다리를 놓아 주었는데

겨울에 징검다리 건너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날 임금이 행차하게 되었는데 아들이 임금앞으로 달려가 고변을 통하여 사실을 아뢰고 다리 놓아 달라고 청을 넣으니

임금이 아들의 효성에 탄복하여 다리를 놓게 하니 청을 넣어 놓은 다라라 하여 청다리한다

아마 첫번째가 사실감이 있다

 

하버드대학 보다 93년 앞선 우리나라 사립대학인 소수서원

 

 

"강학당"  유생들에게 강의 하던곳 

 

 

은행나무뒤에 보이는 정자가 경렴정 서원정자로는 가장 오래된 곳

초서의 대가인 황기로가 퇴계 앞에서 쓴 글씨이다

 

 

순흥 출신의 고려후기 최초의 성리학자인 회헌 안향 선생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숙수사라는 기존 절터위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시절 공식교육기관으로 인정을 받고자 사액을 요청하여

 명종이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을 지어 전답과 서적을 하사하니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입구에 들어서니 적송군락이 휘어져 세월을 느끼게 한다

고등학교 시절 교련복을 입고 M-1총을 메고 수통에는 소주를 채우고 행군하여 풍기에서 이곳까지 소풍을 오곤 하였다

 

본디 이곳은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정축지변사건으로 세조가 모두 불태워 버리고 지금은 당간지주만 덩그라이 남아 있다

 

죽계천 건너펀의 바위에 새겨진 "경"자는 경천애인을 뜻하는것으로 풍기군수인 주세붕 글씨이고

"백운동"이라는 쓴것은 퇴계 이황의 글씨이다 

 

"취한대"는 이황이 대를 세웠으나 무너져 다시 지은 것 "松翠寒溪(송취한계)" 라는 한시에서 따옴

취한이란 "푸른 연화산의 산기운과 맑은 죽계의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라는 뜻이 있다

 

 

"소혼대" 유생들이 호연지기 하던곳. 소풍가서 노래자랑 하던곳.

 

이곳에 있는 소나무는 모두 적송(속과겉이 모두 붉음)으로

일본 국보1호인 "미륵반가사유상"이 여기 적송으로 제작 되었다는 설이 있다 

3백년이상 된 소나무가 즐비하다

 

" 탁청지" 겸암 류운용 풍기군수가 파 놓은 연못

 

 

 

 

 

선비촌 입구

 

 

 

 

 

 

 

인동장씨 고택 민박도 가능하다.

 

 

 

소수서원에서 청다리를 건너면 선비촌이 있다

산재되어 있던 고택을 한곳에 모은곳으로 민박도 가능하다

가족들과 여행와서 하루밤을 즐기고 근처 명승지를 둘러보는 것도 궨찮다  

 

 순흥 읍내리고분벽화

 

 

 

 차를 타고 지나치기만 하던곳을 길꾼이 되니 들러보게 된다

 

순흥에는 메밀묵밥과 기지떡이 참 맛있다

나는 풍기에 가면 빠짐없이 친구랑 순흥에서 묵밥을 먹고

그리고 횡재먹거리에서 한우를 구워 친구들과 담소하고

 

정도너츠를 사서 집으로 온다

 

 

 

순흥에서 나오다 보면 동양대학교 못미처 잠뱅이재 올라 가기전 우측편 봉우리가 솟은 작은산이 있는데

과거 우리 산골내기 과수원이다 .뒷산에는 할아버지 산소가 있고 많은 추억이 살아 숨쉬는곳

들어가는 길가 입구에 풍기천홍삼원이라고 있다

나와 여동생이 운영하는곳이다  3년을 했는데... 그럭저럭

년수가 거듭 할 수록 찾던 사람들이 꾸준히 찾는다

홍삼액이 필요 하시분은 연락 바랍니다.(골드는 십만원,프리미엄은 십오만원)

연락처는 010-3715-7691 김 헌수

다음번에는 광고성 홍삼이야기를 써야겠다 영 매출이 신통치 않아서...

고향에 있는 자락길이라 할 이야기가 무척이나 많고

많은 기록도 남기고 싶으나 다른제목으로 상세하게 나중에 적어 놓아야 겠다

다음에 내려가면 죽령옛길과 단양쪽 자락길을 걸어야지.

 

2011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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